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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텐보로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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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이 욕먹는 이유 나의 잡상

1. <82년생 김지영>의 제일 큰 문제점은 “차별받는 여성”과 “민폐끼치는 여성”을 동일시 함으로써 “민폐 여성”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는것 아닌가?

2. 그러니까 차별받는 여성과 민폐여성의 분리가 이뤄져야 차별받는 여성에 대한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

이슬람 난민들이 그렇게 불쌍한가? 나의 잡상

1. 환단고기 맹신하는 사람들을 까는 사람이 이슬람 난민들에 대한 인권주의자들의 주장을 맹신하고 있네.

2. 나는 이슬람의 여성탄압과 이슬람 극단주의, 이슬람 오일머니 이 3개를 떼어놓고 생각할수 없다고 얘기했는데

3. 이 인간은 내가 딴소리 한다고 차단해놓고 인권에 대한 기본개념이 없다고 다른 사람하고 디스질 중

4. 인권에 대해 무개념인건 이슬람 극단주의와 그들이 배후 조종하는 이슬람 난민들이겠지

5. 상대가 종교적 신념이라는 칼을 내 등뒤에 찌를 준비를 하고 다가오는데 그런 사람들이 포함된 집단을 무조건 같은 인간으로만 봐줘야 되나?

6. 게다가 이슬람의 여성할례 같은걸 울나라 포경수술하고 동일시 하다니....제정신 맞나?

남편 살해범에게도 관대한 판사님 시사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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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지 남편이 장인에게 버릇없다는 이유만으로 칼로 찔러 죽이다니.....

2. 근데 판사는 엄벌이 필요하다면서도 고작 5년 판결

3. 이게 여성단체와 메갈충들이 주장하는 동일범죄, 동일처벌인가?

(펌글) 시베리아로 끌려간 미군과 한국군 포로들 역사게시판

출처링크 : https://www.facebook.com/groups/262962560746926/permalink/579928205717025/



저자: 민경철


사라진 한국군 포로들과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 이송설에 대하여-

6.25전쟁의 포로문제는 여느 전쟁과 마찬가지로 유엔군과 공산측이 각각 포로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여 수용 중인 포로들을 우대하고 전후에 모두 송환했더라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으나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한국군 포로들은 상당히 많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휴전협상에서 공산군 측은 한국군 포로의 대다수를 명단에서 누락시킨 채 북한군이나 주민으로 편입 시켰으며 그 결과 아직도 북한에는 돌아오지 못한 많은 이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1993년 8월 미-러 합동포로 실종자위원회에서 6.25전쟁 시기의 미군포로와 실종자를 추적하던 중, 강상호 전 북한 내무성 차관 증언과 미군 첩보 보고서 등을 인용하여 '전쟁 중 국군 포로 수천 명이 소련으로 끌려갔다' 라는 주장을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자료는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데, 러시아 정부마저 이를 부인하고 있어 그 실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며 그동안 학계에서는 1930년대 소련 한인들의 강제이주 및 노무인력 동원, 태평양전쟁 말기 소련군 포로가 된 후 시베리아 수용소에 억류된 한인 귀환 문제, 솔제니친과 샬라모프의 작품을 통해 밝혀진 강제노동수용소에 대한 관심 등이 있었지만 국군포로 소련 이송과 관련해서는 언론에 보도된 내용 외에는 전혀 연구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 국방부에서 미군포로와 실종자를 추적하면서 정리한 미/러합동전 쟁포로 및 실종자위원회의 조사활동 보고서와 발간물 덕에 일부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정전 조약이 체결된 이후 송환된 한국군 포로는 송환불원자 326명을 비롯해 사망자를 포함, 모두 11,000여 명에 불과했으며 북한 측이 포로교환 문제와 연관되어 포로만의 통계를 발표하고 있지 않아서 포로의 전체 통계를 알 수는 없었으나, 중공군의 발표로 한국군 포로의 규모를 일부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1950년 10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중공군이 사로잡은 포로는 한국군 37,532명을 포함하여 총 46,088명이며 여기에 2009년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러시아로부터 수집한 소련 국방부 문서에 따르면 전쟁 중 3년 간 발생한 한국군 포로 41,350명, 미군 등 14,450명 총 55,800명이라고 정리되어 있습니다.

미군 및 기타 포로 규모가 14,450명인 점에 대해, 미 국방부 포로실종국 연구자는 이 현황이 약간 부풀려진 것으로 본다며, 실제는 약 9,000명이라고 지적하고 있죠.

그러나 한국군 포로의 규모는 북한이 포로의 규모에 대해 구체적인 해명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전체 포로 규모와 미귀환 한국군 포로, 시베리아 이송포로 등을 규명하는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으며 이미 장융과 할리데이는 마오쩌둥이 북한에 한국군 포로를 강제로 억류하도록 한 인원이 약 6만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전체 한국군포로 가운데 북한에 남아있는 미귀환 한국군 포로의 규모를 추정하기에는 자료가 매우 제한적이나, 불행 중 다행으로 중국 연구자인 심지화는 1953년 12월 초 주북한주재 소련 대리 대사가 본국 외무부에 보낸 문서를 발굴하여 당시 북한에서 억류하고 있는 미귀환 한국군포로 규모가 13,094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가운데 6,430명은 북한군에 복무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내무성과 철도부대의 각종 공사에 동원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북한 주재 소련대사관의 문서를 신뢰한다면, 남한에 송환된 인원과 북한군과 노동자로 동원된 13,000여 명 외에 나머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1994년 10월 탈북한 조창호 소위는 남으로 송환하지 않고 교화소에 잡아 놓은 포로의 수효가 3만 명에서 5만 명쯤으로 추정된다고 언급했으며 일부 연구자는 여전히 남아 있는 한국군 포로는 5~6만 정도가 된다고 예측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결국 송환되지 않는 국군포로들은 북한군과 주민으로 편입되었거나 시베리아 이송 등의 가능성이 있으나, 북한 측 자료에서는 전혀 소련으로 이송되었다는 증거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1993년 11월 중순, 국내 언론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포로의 러시아 생존여부 확인과 유해 반환을 위해 만든 미러합동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전쟁 때 공산군에 붙잡힌 한국군 포로 수천 명이 비밀리에 구소련으로 끌려갔다' 고 언급합니다.

그 내용은 북한군 2인자로 포로 이송에 관여했던 ‘고간산’ 퇴역 중장이 1992년 11월 이 같은 사실을 폭로했다면서, 한국군 포로가 집단적으로 소련에 끌려간 사실이 미국 측 문서에 의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강조되었죠.

여담이지만 저 고간산 중장이라는 사람은 실존하지 않았고, 원문의 ‘Kan San Kho’를 영어식으로 이해하여 고간산으로 거명되면서 이름이 잘못 알려지는 헤프닝이 벌어집니다. 사실은 강상호 전 북한 내무성 차관의 증언이었죠.

그는 소련이 당시 이들 한국군을 미군포로 등과 함께 해상과 육상으로 비밀리에 이동시켰으며, 육로의 경우 만주횡단철도와 북한에서 러시아 극동 지역인 프리모르크샤로 이어지는 철도편이 사용되었다고 언급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포로들은 선박에 실려 동해 및 오오츠크해 연변 구소련 항구들로 수송된 후 그곳에서 다시 철도편으로 옮겨졌으며, 이들 한국군 포로 대부분은 시베리아 벌판이나 일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300~400여 개소의 비밀 수용소에 보내졌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동시에 UN군 포로 심문을 담당했던 러시아의 코로트코프 박사는 전역 이후 러시아 국방부 산하 군사사연구소에서 전쟁사를 연구하면서 한국전 당시 북한군에 의하여 포로로 잡힌 한국군 일부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송되었다고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내용의 비밀문서가 KGB의 비밀문서고에 여전히 보관되어 있다고 주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전쟁 초기 소련극동군총사령관 직속 한국전 전담 정보반 에서 장교로 근무하면서 UN군 포로에 대한 심문을 했을 때 포로 담당 장교들로부터 한국군 포로 이송에 관한 얘기를 분명히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분명히 한국군 포로들이 시베리아, 즉 소련 당국에 의하여 끌려갔다는 의미가 되며 이미 93년도에 미 국방부는 CIA의 1952년 9월 2일 첩보에 의거하여 한국군 포로 수천 명이 소련 당국에 의하여 시베리아로 압송되었다고 보도하게 됩니다.

첩보에 의하면 포로의 이송은 1951년 11월부터 1952년 4월까지 태평양 해안과 타타르 해협이 얼어있을 때에는 기차로 치타를 경유해 몰로토프로 옮겨졌으며 한국군 포로와 납북자들을 중심으로 소련의 극동항구인 오호츠크 일대로 이동한 후, 야쿠츠크 주변의 콜리마 수용소 등으로 보내졌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추크치해 지역으로 이송된 포로들은 최소 12,000명에 달하고 도로공사와 비행장 건설 등에 동원되었고 추위와 기아, 혹독한 대우 및 노동조건으로 인하여 사망률이 높았다고 기록되어 있죠.

이들 포로들은 동시베리아해의 니즈니 콜리마스크지역의 수용소들로 보내 도로, 전력소, 비행장 건설에 동원되었으며 우스트 마이스크와 야쿠츠크 사이에 위치한 한국군포로 전용 수용소들은 50~200km 간격으로 500~1,000명이 각각 수용돼 있고 탄광, 토목, 댐 공사 노동을 하고 있다고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 수용소에서는 1952년 2월부터 4월까지 300명이 사망했을 정도라고 언급했는데 매우 힘겨운 육체적 노동을 하고 원시적 이하의 생활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주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혹독한 대우를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지역 거부 첩보원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된 연합정찰사령부의 1953년 1월 5일 첩보에 의하면 북한 노동당 명령에 따라 정치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약 20,000명이 북한 내 여러 감옥에서 1952년 9월 중순 우라기로 이동되었으며, 이들은 우랄루 전력발전소 건설 현장에 투입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북한이 한국전쟁 당시 구 소련의 우랄지역에만 한국군 포로 6,000명과 민간인 납북 인사를 포함한 총 20,000명을 끌고 가 강제노역을 시킨 셈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한국 정부가 지난 2007년에 제기했으나 러시아 당국은 '법적으로 포로 를 이송시킬 수 없었으며, 실제로 없었다' 라며 해명했으나 미 국방부 포로실종국에서 1990년대 이후부터 계속 미군포로와 실종자를 추적해왔던 한 연구자는 한국군 포로의 시베리아 이송이 ‘거의 사실일 것’ 이라면서 러시아 당국의 해명을 단칼에 반박합니다.

시베리아로 이송되었다는 한국군포로의 규모가 미군 실종자보다 많 기 때문에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으며,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강상호 전 내무성 차관의 증언과 미 중앙정보국, 연합정찰사령부 등의 첩보,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련 내무부 요원 2명과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직원에게 입수한 정보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한국군 포로들을 2만 명 이상을 끌고 간 이유는 다름아닌 노동력 착취를 위한 것이었으며, 6.25전쟁 이전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독일군과 일본군 포로들이 귀환한 후 시베리아 지역에는 인력이 부족해졌고 이를 대체할 만한 인력이 바로 한국군 포로 및 납북자들이 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계속-

출처

6.25전쟁 국군포로의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 이송설 연구, 조성훈

한국일보

한국군 포로 시베리아 이송, 주미대사관

사극 같았던 꿈. 나의 잡상

어젯밤 사극에 가까운 꿈을 꿨는데 한밤중인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여 올려본다.


1. 나는 일제시대 나치통치하의 유럽으로 유학간 조선인 대학생이었고 현지에서 친구 두명이 생겼는데 한명은 미국인, 한명은 유대인이었다.

2. 어느날 나찌가 모든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기 시작하자 유대인 친구도 거기 끌려갔다.

3. 미국인 친구와 같이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처자식만이라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했지만 그 흔적을 쫓아가는것도 힘에 부쳤었다.

4. 주변의 주택에 현지인들이 숨겨준 유대인들이 다락과 지하실에 넘쳐났다. 숨어있는 유대인들의 겁에 질린 눈과 유대인들을 숨겨준 현지인들이 외부손님들을 대접할때 와인 같은 술을 주면서 억지웃음 짓는 장면이 생생하다.

5. 유대인 친구의 처자식 찾는걸 거의 포기할때쯤 꿈에서 깼다.


아직도 꿈의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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