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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왜곡을 안하면 여성운동을 못하나? 시사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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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년반 정도 지난 기사인데 이걸 보고 처음에 든 생각은 "여성운동은 통계왜곡을 해야만 가능한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2. 저렇게 통계왜곡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재작년부터 나오고 있는데도 작년까지 언론사에서는 왜곡된 통계에 근거해 기사를 썼던게 기억나는데..... 이대와 여성계를 안좋게 보는 한경오 기자들은 사내에서 매장된다는 얘기가 생각난다.

유관순열사의 1등급 훈장 수여는 합당할까? 시사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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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훈장은 세운 공로에 따라서 주는것이다.

2. 하지만 이번에 정부는 인지도가 높고 국민청원이 있었다는 이유로 유관순 열사에게 1등급 훈장을 수여했다.

3. 근데 유관순 열사에 대한 국민청원은 10건 넘는 걸 다 합해도 3만명밖에 안되는데?

4. 게다가 공로가 있어도 인지도가 낮은 무명 독립운동가들은?

5. 무명 독립운동가들이 나중에 인지도가 높아지면 그사람들에게도 전부다 추가로 훈장 줄껀가?

6. 유관순 열사 말고도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한 여성들도 있는데?
유관순만큼 열혈 독립운동가였지만 그만큼 주목받지 못한 여성들

7. 이 정도로 절차를 무시하면서 유관순 포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빠르게 결정을 한 이유가 뭘까?

8. 그건 바로 유관순 열사가 당시 기준으로 고학력 엘리트라서 페미들이 내세우기 좋은 인물이라 그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관순만큼 열혈 독립운동가였지만 그만큼 주목받지 못한 여성들 역사게시판

아래 서술한 글의 출처는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전집 중 박용옥의 [여성운동]입니다.


조마리아
안중근의 어머니되는 여성으로
1962년 출생
1907년 아들 안중근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적극활동
1910년 안중근 가족들과 안중근의 형제인 공근, 정근의 가족들과 만주로 망명
이후 맏손자이자 안중근의 맏아들 분도가 일본밀정이 준 독과자를 먹고 사망
1920년 가족들과 함께 상해로 이동, 이후 상해임정에 참여하여 임정내 분란을 중재
1927년 7월 15일 위암으로 사망

이상의 출처는 박용옥의 여성운동 중 p77~p114

2008년 8월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윤희순
1860년 6월 출생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인하여 의병이 일어나고(을미의병) 시댁가문의 남자들과 시아버지인 유홍석이 이에 참여하려하자 자신도 의병이 되겠다고 주장하지만 시아버지가 말려서 뜻을 이루지 못함.
이후 거주중인 마을에 의병이 들어와 식량과 식사를 요구하지만 동네 주민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집안의 식량과 남이 맡긴 곡식까지 털어 의병들에게 식사제공
그 직후 마을 여자들을 모아 의병에게 도움을 줄것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킴. 그리고 반일활동을 독려하는 포고문과 노래를 지어서 마을주민들에게 배포
이런 활동으로 인하여 지역에서 유명인사로 널리 알려짐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난 뒤 시아버지 유홍석과 유중악이 의병대를 조직하자 마을여성 30명을 모집하여 의병대의 취사와 세탁을 담당하고 화약, 화승총 제작과 군자금 모금으로까지 활동을 넓힘
1910년 한일합방 직후 만주로 망명한 시아버지의 행방을 캐기위해 일본헌병이 윤희순과 아들 돈상을 체포, 고문하지만 시아버지에 대한 진술 거부
1911년 만주로 망명, 망명자 가족들의 식량부족 해결을 위해 중국인들에게 식량을 빌리러 다님. 항일노래를 제작, 배포
1912년 항일교육을 위해 노학당이라는 학교를 지음
1926년 아들 유돈상이 무순에 조선독립단학교를 세우고 학생들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자 50대 후반의 나이로 훈련에 참여.(이후 주변인들은 그 가족들에게 가족부대라는 별명을 지어줌.)
1935년 아들 유돈상이 일본경찰에게 기습체포되어 고문으로 사망하자 가족들에게 항일운동을 포기하지 말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사망

이상의 출처는 p263~p275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남자현
1872년 12월 출생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고 남편 김영주와 친정아버지의 제자들이 의병에 참여하자 임산부의 몸으로 참여, 의병대 조직과 모집, 정보수집 활동을 함
1896년 7월 홍구동 전투에서 남편 김영주 전사
1919년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친구가 도움을 요청하자 서울로 가서 3.1 운동을 준비하고 참여함
3.1 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중 하나인 서로군정서에 입대
1921년 삼송 육도구 전투에 참전
1925년 일본총독 암살단을 조직 및 준비하였으나 일경의 감시로 실패
1926년 안창호가 장작림 산하 중국경찰에게 체포되자 석방운동에 참여
1931년 독립운동가 김동삼이 체포되자 구출작전을 세웠지만 시간부족으로 인한 준비부족으로 실패
위의 활동외에도 여학교 1개와 여성교육회 20개를 만들어 항일사상교육과 계몽운동을 주도함.
1933년 만주국 일본전권대사를 살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실패
일본경찰의 고문과 단식투쟁으로 목숨이 위급해지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그 직후 적십자 병원에서 사망

이상의 출처는 p275~p287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여


오광심
1910년 3월 출생
1929년 만주의 화흥중학교 사범과를 졸업
1930년 통화의 배달학교 교사로 부임, 조선혁명당에 입당
1931년 동명중학교 부설 여성국민학교 교사로 부임
1932년(?) 조선혁명군에 입대, 사령부 군수처에서 근무
1932년~34년 사이에 조선혁명군 참모장 김학규와 혼인
1934년 김학규와 함께 남경으로 이동, 도착 후 임정의 활동을 조선혁명군에 보고하는 일을 맡았으나 조선혁명군 내부인원 중 일본으로 전향한 배신자의 테러로 심한 화상을 입음.
이후 남편 김학규와 함께 조선혁명당과 임정을 통합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혁명당 창당에 공로를 세움
1935년 민족혁명당 입당. 그 이후 임정 소속 동지들의 가족들 교육에 참여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임정과 함께 피난하던 중 임정 간부들의 자녀들과 청년공작대를 조직, 항일선전활동을 시작함.
1940년 중경에서 임정이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자 입대, 광복군 산하 기관지 창간과 간행에 참여
1941년 남편 김학규가 지휘하는 광복군 3지대원으로 함께 안휘성으로 이동, 현지의 재중동포와 일본군내의 조선청년들을 대상으로 항일선전을 시작함.
1948년 인천을 통해 귀국
1949년 남편 김학규가 안두희와 관련있다는 이유만으로 김구암살의 누명을 쓰게 되자 구명운동을 시작했으나 실패
1950년 6.25 발발로 남편이 풀려났으나 북한군이 납북시키려 하자 부부 모두 피신
이후 생활고로 남편의 동지들을 찾아다니며 생활비를 구함.

이상의 출처는 p305~p330

1976년 사망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

10대 맘의 학습권을 보장해야 한다. 나의 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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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웹서핑 중에 발견한 몇년 전 기사인데 이걸 보고 깜짝 놀랐다.
"조선일보에서도 이런 기사를 올릴때가 있다니??"


2. 민주주의 사회는 개방된 사회이다.


3. 개방된 사회에서는 성문화도 개방되는게 당연하다.


4. 개방된 성문화에서는 10대들이 성생활을 하는것도 당연한 것이다.


5. 하지만 우리나라는 미혼녀, 특히 10대 여성들의 임신과 출산을 범죄시하고 있다.


6. 보수적인 성문화가 지속될수록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들, 특히 10대와 20대 여성들이다.


7. 하지만 우리나란 여성단체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 형식적으로 반응하고 있잖아.... 우린 안될꺼야 아마.......



우리 옆의 조현아, 조현민 나의 잡상

이제야 하는 얘기지만 모든 사람들이 조현아, 조현민의 갑질을 욕할수 있는건 아니다. 나의 경우 알바를 주유소로 처음 시작했는데 거기서 1년정도 알바 하면서 갖가지 진상을 다봤다. 5만원 주유해야 줄수 있는 곽휴지를 3만원 넣고 왜 안주냐고 물건 던지는 20대 여자부터, 여고생이 계산 잘못해서 승인 취소에 사인좀 해달랬더니 여고생에게 이년 저년 x년 x년 c8년 하고 온갖 쌍욕 다하면서 여고생 가슴에 펜을 집어던지는 할배도 봤다. 이런 사람들도 조현아나 조현민 같은 사람들을 욕한다면 그거는 진짜 자기모순 아닐까? 아침에 늦잠 자서 택시 탓다가 진상 고객에 대한 얘기들을 듣고 써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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